배우기만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의 이치를 밝게 깨닫지 못하고,
생각할 뿐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쉽다.
-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論語》


  근자에 와서 <자기계발(自己啓發)>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도 정착(定着)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의 출전(出典)은 《논어》이다.


󰋫 <계발>의 원래의 뜻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분발하지 않으면 계도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여 고심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를 인도하여 통하게 하여 주지 않는다. 네모난 것의 한쪽 모서리를 가르침 받으면, 나머지 세모서리를 자신이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도 알려고 애쓰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무엇을 가르쳐도 헛일이다. 그럴 필요는 없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則不復也)>
  열정이 없는 자에게 결실은 없다. 배우는 자 스스로가 터득하려고 무한 애쓰는 사람이라야 스승의 가르침으로 미묘한 이치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열심이 없다면 이를 계도(啓導)하여도 헛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분불계, 불비불발(不憤不啓. 不悱不發)>의 본래의 뜻이다. 그리고 이대목이 <계발(啓發)>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이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계발>이란 것은 본인 스스로가 해야겠다는 열정이 밑바닥에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 하겠다.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될까 하고 진심으로 구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나로서도 그 사람을 어찌 해 줄 수가 없다(不曰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자신이 마치 강요하는 것 같은 일은 입에 담지 않는다. 상대의 의욕과 열성에 응해서 계발해 준다. 이것이 공자의 기본적인 교육방침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공자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 모두가 의욕에 불타는 인간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재여(宰予)라는 제자가 있었다. 변설(辯舌)에 있어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학업에는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재여에 대하여 공자는
  <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 나태하고 정신이 썩은 사람은 가르치는 것도 불가능하다.(朽木不可雕也)>라고 말하면서 단념하였다고 한다.


󰋫 실천적인 <공자의 학문>
  그렇다면 배우는 측에서 말한다면, 의욕 이외에 어떠한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우선 참고가 되는 것이 표제로 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가르침이다. 표제에서 풀이하여 게재한 바 있으나 이를 좀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독서에만 몰두하고 사색(思索)을 게을리하면 독선적으로 된다. 요컨대 책을 읽는 일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서 소화하는 일, 이 양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배운다는 것은 , 단지 책을 많이 읽어서 책벌레가 되는 일이 아니며, 거기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배에게 글을 배우고 항상 되풀이하여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한 번 배우면 그것으로 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회 있을 때마다 복습하게 되면 그 참뜻을 알게 된다. 또한 실천을 통해서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체득의 기쁨이야말로 무상(無上)의 기쁨이며 참된 기쁨이다.
  공자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자신과 다른 두 사람이 행동을 함께 하거나 혹은 어떤 일을 함께 행하면 내게 있어서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三人)이란 반드시 세 사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가령 나 자신과 공동으로 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선(善)을 보면 이를 따르고, 다른 사람의 불선(不善)을 보면 반성하게 되므로 그 선․불선을 행하는 자가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공자는 해야할 일은 척척 해치우고, 발언에는 책임을 지고, 그 방면의 선배에게 사사(師事)하여 독선에서 탈각하는 일, 이것이 학문을 하는 일의 의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학문하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인으로서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공자가 지향한 학문이란, 매우 실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 고인(古人)의 지혜는 단지 지게미일 뿐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라는 군주가 서재에서 독서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윤편(輪扁)이란 자가 일손을 쉬고 말을 걸어 왔다. 윤편은 수레를 만드는 목수이다.
  “임금님, 그 책에는 대관절 어떤 일이 씌어 있습니까?”
  “이것 말이냐, 성인의 가르침이란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오니까?”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셨느니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씌어 있는 것은 옛날 사람의 지게미와 같은 것입니다요.”
  “지게미라고? 목수 주제에 무슨 망발이냐. 변명이 된다면 용서하겠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안색을 달리한 환공에게 목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단지 오랜 세월 일의 경험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옵니다.
  예를들어 말씀드린다면 수레의 굴대받이는 수레바퀴보다 커도 아니 되며 작아도 아니 되옵니다.. 양쪽을 빈틈없이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요령을 터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요령은 말씀으로는 설명할 수 없읍니다만 결코 우연을 의지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제 자식놈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그 요령을 터득시키려고 했읍니다만 잘 되지 않사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이 칠십인 이 늙은 놈이 굴레받이만은 아직도 제가 만들고 있사옵니다.
  옛날의 훌륭하신 분들께서도 가장 요긴한 일들은 말씀 못하시고 돌아가신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임금님께서 읽고 계시는 책도 옛날 사람의 지게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수의 말 중에서 중요한 대목인 《장자》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성현의 지게미일 뿐입니다.(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
  오묘한 진리는 말이나 문장으로 전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또한 고인은 이미 죽고 없으므로, 남아있는 말이나 문장은 그 정수(精髓)를 잃어버린 지게미와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기술의 노하우라든가, 경영의 육감 등은 이 목수가 한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벌레가 된다면 모처럼 애써 얻은 지식도 쓸모가 없어진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소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계발>만 하더라도 잡다한 지식을 모아놓기만 하면 단지 박식(博識)한 사람으로 그치고 만다. 자기계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실천에 도움이 되도록 지향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인생의 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  (2) 2016.02.14
꼬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0) 2016.02.10
Posted by 가을고추
,